철인 이광원
대회 후 후기를 쓰지 않으면 숙제를 끝내지 않은 학생처럼 불안하고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어떨 땐 글을 남기기 위해 대회에 참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말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이 들었을 때 웃음을 주거나 감동받을 소재가 없으면 절대 말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짧은 시간 트라이애슬런 대회만큼 글 소재로 좋은
경우가 또 있을까?
주최측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우리 age 부에서 일등을 했다고 했다.
분명 경기 후 이등으로 입상 트로피까지 받았는데… 일등으로 들어 온 선수는 달리기를 다
뛰지 않았다고 했다. 잃었다 다시 찾은 트로피가 더욱 반갑다.
훈련:
경기는 훈련의 결과물이다. 훈련 없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지난 겨울 3개월 동안
실내에서 처음으로 로라훈련을 받았다. 처음 별 생각 없이 시작한 훈련이 날이 갈수록 로마
시대 검투사 양성소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노골적인 섹스와 잔혹한 장면으로 말이 많았던
미드 스팔타쿠스에 나오는 노예 검투조련사 오나머스 같은 송강섭이 이끄는 검투조련소에서
목숨을 건 훈련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그 추운 날씨에 땀 한 바가지를 쏟고도 모자라 스커드
600개를 끝마쳐야 집에 갈 수 있었다. 40km를 서로 경쟁시켜 빨리 타게 하는 날에는 그를 죽이고
싶은 살인충동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3월, 훈련이 끝나자 사이클을 골방에 가두고 방치하다 4월부터 토요일 마다 한번씩 유명산등
으로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는데… 토요일 날 비가 오면 못타고해서 거의 한달 가까이 잔차를
타지 못하고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겨울에 열심히 탔으니 작년 정도는 타겠지 하는
막연한 자만심을 가지고…
2011.5.22
새벽 4시에 일어나 급하게 밥을 먹고 춘천으로 갔다. 고속도로가 생기고부터 춘천은 먼 지역이
아니다. 1시간 20분쯤 걸려 대회가 열리는 의암스포츠 센터에 도착했다. 등록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잔차 거치하고 시간이 빠듯하다. 물에 한번 들어가 봐야되는데… 물이 차다. 후드를
안 가지고 온 게 후회스럽다.
수영(2km):
7시 600여명의 선수가 우루루 차거운 의암호로 일제히 뛰어 들었다. 양동이에 풀어 놓은
미꾸라지가 요동치듯 일순간 물속에 회오리가 일었다. 수영을 하는 건지 물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건지 정신이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서야 한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맴돌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굳어 정상적인 수영 폼을 유지할 수도, 빨리 가야겠다는 의욕도 없다. 어떻게든지
아수라장 같은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삶에 대한 의욕만 있을 뿐, 눈물겨운 역투에도
불구하고 완주하지 못한 25명의 포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
해야 할 것 같다.(():44:54, T1: 0:05:30)
사이클(91km):
(사진: 송이엄마)
찬물 수영으로 인해 몸이 완전히 굳어 있고 한기가 느껴졌다. 경기복이 다 마를때 까지
추위는 계속되었다. 아무리 밟아도 사이클이 나가지 않는다. 내리막에서도 50km/h 를 넘지
않는다. 어디 고장이 났나? 아무리 최근에 훈련을 못했어도 겨울동안의 피 말리는 훈련이
있었는데… 우리가 하는 이 운동은 저축이 되지 않는다. 런이나 사이클이나 한달 동안 쉬면
능력의 50%가 없어진단다. 우린 너무 피곤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둘 때까지 잠시
쉴 수도 없는… 에이지부 경쟁자 유제형이 8바퀴째 날 추월해 갔다. (3:06:26 T2: 0:01:58)
(바꿈터로 가는 중... 사진: 김창욱)
런(21km):
(사진: 강동클럽 김창욱)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7km 3바퀴를 뛰어야 한다. 천천히 뛰었다. 다리에 쥐났다는 유제형를
바로 만났다. 내가 추월하자 그가 날 계속 뒤에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턴 지점에서
백승엽을 만났다. 거의 6분 차이였다. 하프코스에서 6분 차이는 거의 뒤집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지나 보다. 그가 날 잡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 확신은 두 번째 턴
지점에서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4분 차이로 시간이 줄어들었다. 난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더 빨리 뛰는 습성이 있다. 한 바퀴째 간격이 줄어들었다는 건 그가 지쳐 있다는 걸 의미한다.
두 바퀴가 되기 전에 걷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무척 지쳐 있었고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아
보였다.
시합 중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시점이 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걸 다 준다 해도 다 귀찮은…
그 상태에서 포기하지 않고 몸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에너지 찌꺼기까지 불사르며 달린다는
건 강인한 정신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참으며 달리게 하는 건 우리의 정신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감적으로 유제형이 바로 뒤에서 따로 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힘 든다. 마지막 얼마 남지 않았다. 언덕을
넘어서면 내리막이고 500m 뒤에 피니쉬라인이 있다. 이수동이 뒤에서 따라오니 빨리 뛰라고
했다. 중력이 허락하는 한 100m 달리기 하듯 뛰기 시작했다. (1:51:41 Total 5:50:29)
피니쉬라인:
주최측에서 깔아둔 피빛 카펫트 위로 올라섰다. 이제 7-8m 만 가면 이 징그러운 경기는
끝이 난다. 그런데 다리가 이상하다. 내 의지를 벗어난 다리,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한 두 발짝 옮기는데 또 넘어졌다. 기어가야하나…. 또 일어나 뛸려 하자 또 넘어졌다.
3번 넘어지고 가까스로 결승테이프를 잡을 수 있었다. 이호섭이 날 부축해 주었다.
가끔 결승점에서 비디오로 본적은 있었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리가 아프거나 특별한 고통도 없이…
우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먼저 들어 온 선수가 있다고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무명의
선수였다. 참가자 명단을 보면 누가 나의 경쟁자가 될지를 맞추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 아침에 혜성처럼 나타날 수 없는 게 이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등 트로피까지 받고 백승엽이
사주는 닭갈비 먹고 서울로 복귀했다. 내가 일등이란 사실을 안 건 이틀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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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백승엽선수가 아이언 윙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참 지독한 형님,내가 참 좋아하는형님.
쓰러지고 일어나고,쓰러지고 일어나고 또 쓰러지고 일어나고...
온 힘을 다한경기.
3M 앞에 보이는 피니쉬라인.
그것도 3번씩이나....(기어서 들어가려 했단다...)
이런 의지를 보여줄 철인이 몇명이나 있을까??
참 지독한 형님....
몸의상태,운동능력,경기분석,철저한 자기절제.....그리고 가진힘 다쓰고 골인지점 들어오기...
말하고, 한말 그대로 실천하는 형님.
동호인 장비가 전부 프로수준이라고 나를 머쓱하게 하는 형님.
철인은 체력으로 하는것이 아니란걸 늘 형님에게서 배운다.
내가 참 좋아하는 형님....
대회전날 형님이 전화를 몇번씩 하신다.욕심 부리지 말라고...
대회 3일전부터 지독한 장염과 독감으로 고생하고 의사에게 링거를 부탁해도 혈압이 높다고 놔주지를 않는다.
의사가 괜찮다고 거짓말하고 나혼자 간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나선 솔이엄마(본인에겐 내가 국가대표란다 ㅋㅋ).
자전거 7바퀴에서 형님을 추월한다. "형님 뭐해!!" ...휙하고 지나간다.
1번째 런에서 형님을 만난다.대략 5~6분차이...이번엔....
2번째 런에서 몸에 이상이 온다.예상은 했지만 너무 빨리왔다...추월 당하지 말아야하는데...
내 등짝을 사정없이 누군가 때린다. (안봐도안다 형님이다)"여기서 뭐해!!...획 하고 가버리신다.
몸에서 남아있던 힘과 의지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쭈~우욱...
나는 형님 처럼 쓰러지며 가지못한다.
내 의지와는 이미 협상테이블에서 다끝냈기 때문에...
그래서 광원형님이 좋다.
그렇다고...기절할 정도로 뛰어오진 마세요...ㅎㅎㅎ...
문철 2011-05-25 10:59:35 [답글] 인생의 모진 경험을 다한 40~50대에 만나서,
수 년간 변함 없이 매주 2~3차례 만나 함께 운동하며
그리고 가끔씩 인생을 논하는 그런 관계를 이어 간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원형님! 이젠 시상대 자리 다른 분께도 나눠주시죠?ㅋㅋ
승엽씬 몸이 좋지 않을 땐 나처럼 과감히 휴식을 주는게....
명호씬 대회 신청도 안하고 언제 거기까지 간겨???박재범 2011-05-25 11:05:23 [답글] 이런 스토리가 있었네요
마라톤 주로에서 싸이클이 늦으셨길래 왜 이제 오시냐고 했는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정한 철인 아니겠습니까? 입상 축하합니다.황기룡 2011-05-25 12:41:53 [답글] 아이고~~~ 힘들어라!, 전 아직까지 다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나이 역순으로 경기기록이 레코딩되는것 같습니다. ㅋㅋ
시상식대에서 착오로 에이지 1위 한사람을 런기록이 없는 허당으로 세워서,
시상식대 2위에 섰는데,... 기념품과 상패는 꼭 잘 챙기세요.
결국 올해 연속해서 1위를 차지 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초리형, 명호형 빨리 나오세요! ㅎㅎ이광원 2011-05-25 14:02:39 [삭제] [답글] 이글 보니 웃음밖에 안나오네요... 자기 대회후기나 올리지...
다리풀린다는 얘긴들었지만..
몇초 일찍 들어 올려다 완주도 못할 뻔 했네요.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박용태 2011-05-26 16:53:54 [답글] 글쓴 승엽형님 참 지독한 것 같고, 사진에 나오는 광원형님은 아예 지독 종결자이신 거 같습니다...
아, 형님들 독하십니다 !
글고 광원 형님은 이런 사진에 댓글 다시면서,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라고 하시는 건 또 ???
요즘 몸이 안좋단 핑계로 놀고 먹는 중인 데, 엄청 충격적입니다.
하이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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