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영마치고 사이클을 타기 위해 T1 바꿈터를 벗어나고 있다. 사진: 박용태) 간절히 바라던 비는 오지 않고 따가운 햇살이 등을 태울 것 같다. 편안한 소파에서 TV나 보고 있을 시간에 왜 여기서 명분 없는 고통을 참으며 뛰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는 끝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국가나 민족을 위한 고귀한 희생도 아니고, 돈 버는 일도 아니고 내 돈 들여 이 먼 지방까지 와서 당하는 고통, 식구 친구 모두가 반대하는... 누구에게 조차 위로 받지 못하는... 왜 참가했을까? 왜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적당한 이유나 변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나가서 당할 고통으로 너무 오랫동안 고민해 왔기 때문에...) 천천히 즐기면서 하자란 생각은 그냥 바램일 뿐,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아래서 버틴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걸 천천히 걷는다는 건 고통의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하는데 불과하다.
훈련: 춘천대회를 앞두고 당한 사이클 사고의 여파로 한달 가까이 쉬고 시합 한달 전에 사이클을 끌고 미사리에 나타났다. 사이클 탄다는 게 왠지 어색하고 두렵기 조차하다. 그나마 145km 두 번 탄 게 유일한 위안이다. 수영도 1.5km 두 번, 달리기는 10km 이상 뛰어보지 못했다. 훈련이 너무 부족하여 기록에 관계없이 그냥 완주라도 할 수 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자”는 나의 motto 를 실현시키기에는 너무 준비가 부족하다.
(새벽 집 앞에서 잔차를 싣고 있는 문철씨)
2010. 9. 4 같이 가기로 했던 백승엽씨는 지나친 훈련으로 인한 지독한 대상포진과 독감의 합병증으로 같이 가지 못하고 문철씨와 둘이 영암으로 향했다. 삼호중공업 입구 거리에 설치된 등록소에서 등록하고 앞 바다에서 간단히 수영했다.
( 우리가 묵었던 금호 바닷가 펜션)
2010. 9. 5 오전에 흐리고 오후부터 비가 올 것 같다는 기상대 예보가 있었지만 아침부터 청명한 하늘이 오늘의 불운을 예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영: (3.8km)
주변이 방파제로 막혀 있어서 인지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너무 장거리 수영 연습이 부족하여 천천히 했다. 그래도 1시간 20분 정도에는 들어 올 줄 알았는데...(1:29:01) (T1: 0:05:23)
사이클(180.2km)
90km 까지는 큰 무리 없이 간 것 갔다. 휴게소에서 죽 먹고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선수들이 보이지 않고 그냥 계속 혼자 가야 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 타기가 어렵다. 거의 136km 까지 타고 k1 경기장 트랙으로 들어 섰다. 바람이 너무 심해 유바를 잡을 수 없다. 모든 선수들이 날 추월한다. 그냥 넘어지지 않도록 핸들을 잡고 버티는 건지 앞으로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
300km 시속으로 달리는 경주차로 가면 금방 가겠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허벅지로 폭풍부는 5,6km 트랙 8바퀴는 내게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고 머나먼 42.195km 의 마라톤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숨이 탁 막힌다. (6:15:33)(T2:0:02:31)
(F1 경기장 전경: 사진 유성조) 마라톤(42.195km) 하늘이 원망스럽다. 비를 내려 달라는 나의 간절한 기도는 대회 끝난 다음날 저녁에나 응답되었다. 3km 마다 있는 보급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타 들어 가는 갈증 - 콜라와 포카리, 물을 들이키고 몸에 들어부으며 몸 속에 남아 있는 한줌의 에너지까지 짤아 내야 했다.
5번이나 속고도 또 신청한 나의 우둔함을 경멸하면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저녁 7시가 가까와 오고 있다. 어두움이 저 멀리서 다가 온다. 거의 고통의 마지막을 고하는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시계를 보니 12시간에 들어 오는 것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우린 그 마지막 여유를 즐길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유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우리 민족의 DNA가 내 핏줄 속에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2라는 여유로운 숫자는 이미 내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 낸 숫자는 4였다.
마라톤을 4시간 안에 뛰는 것, 대충 계산해 봐도 지금 뛰는 속도로는 어림도 없는 수치였다. 그건 거의 탈진직전에 몰린 나의 육체에 더 큰 학대을 가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3km 가 지금까지 뛴 39km 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다리가 거의 마비상태에 온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리겠는데 옆구리가 아파왔다. 예리한 칼로 옆구리를 지르는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털석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 잡혔다.
도대체 서버4라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세상에 의미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죽는다는 것도 우주의 법칙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아침에 해 뜨고 저녁에 해지는 것 같은 자연법칙의 하나일 뿐,
그럼 산다는 건,,, 어차피 언젠가는 죽게 될 터인데... 우린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넘어서고 또 죽고 싶은 본능이 있는지 모른다. 그 죽음이 눈앞에 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본능이 사라져 버린지는 오래다.
Finish Line: 피니쉬라인을 통과햿다. 허탈한 기분이다. 4시간 안에 들어 왔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냥 최선을 다해 뛰었으니 후회는 없다. 나중에 기록증에서 확인한 결과는 3:59:59였다.(Total: 11:52:27)
가슴 복 받히는 감격이었다. 너무 슬프거나 기쁘면 눈물도 안 난다고 했던가? 어떤 영화보다 어떤 책보다 한 장의 기록증에 찍힌 짧은 숫자 몇 개가 날 그렇게 감동시킬 줄이야
인간은 감동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그 칼날 같이 예리한 찰라의 환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 있는 한 난 또 내 맹세를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0. 9. 6
(우리 밥상 햇반에 조리 미역국) 피곤해서 인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문철씨가 해남 땅끝마을에 가보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걷기가 너무 힘든다. 다리가 마치 무쇠로 된 것 같이 무겁고 특히 언덕을 내려 올 때는 근육 뿐 아니라 왼쪽 정갱이 쪽 인대가 너무 아프다. 해남 땅끝마을
가까운 줄 알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거의 한시간 걸려 도착했다. 철이 지나서 인지 마을은 조용했고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 밥 먹기도 어려웠다. 가까스로 전복 삼계탕 한 그릇 먹고 펜션으로 돌아 왔다. 이제 2박3일의 방황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한다. 아주먼,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일년쯤 다니다 돌아가는 기분이다. 당분간 일상의단순한 생활에 대한 지겨움과속세에서 받아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