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이광원
인간을 만든 신의 가장 큰 업적은 망각을 통한 감정미화(?)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계속 가지고 살아 간다면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숨 끊어질 것 같은 고통도 지나면 추억이고 즐거운 기억으로 변화되어 버린다. 뛰면서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던 지옥에서의 굳은 맹세는 하루가 지나가기도 전에 천국에서 뛰놀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고 만다. 고통도 중독이 되는 건지 더 큰 고통을 원하는 메조히스트(Masochist)가 되어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훈련:
인간의 근육은 훈련(자극)과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처 발달한다. 회복과정 없는 지나친 훈련은 근육을 망가뜨려 오히려 기록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훈련이 가장 적당한지를 알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회복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강한 훈련일수록 회복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잘 뛸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년의 오랜 시일이 걸리지만 몸을 망가뜨리는 데는 한 달도 너무 긴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이 트라이애슬런은 너무 피곤한 운동이다. 일주일을 쉬면 운동능력의 10%을 잃고 한 달이면 50%나 감소한단다. 자기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매일 뛰다시피 해야 하는데 문제는 회복이 빨리 안 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해야 한다. 그런데 단어 중에 가장 애매모호한 낱말이 “적당”이니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인지…
2013.9.28
거리도 멀고 해서 구례대회에 처음부터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21만원 하는 Zoot 운동화를 준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참가를 결정했다. (참가비 20만원)
구례에 같이 가기로 약속한 와이프가 감기로 못 가겠다고 하루 전에 일반통보를 해왔다. 예전 같았으면 법적 문제까지 들썩이며 야단이 났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건 정말 가기 싫다는 얘기가 아니고 나를 위해 가준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이란 걸…
서울에서 3시간 남짓 구례에 도착했다. 구례 공설운동장엘 갔더니 아무 표시도 없어 백승엽선수에게 전화를 했더니 송원리조트에서 등록한다고 했다. 간단히 등록하고 수영시합이 있을 구만재 저수지에 갔다. 산으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호수였다. 다시 구례시내로 나와 작은 모텔에 숙박을 정했다. 와이프가 가져온 작은 전기 밥통에 밥을 안치고 아침에 먹을 떡과 바나나를 사러 나왔다.
아무리 시합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최면을 걸고 아무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몸은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스트레스받는지를 말하고 있다. 시합 전날은 소화도 안되고 잠도 잘 자지 못한다.
2013.9.29
아침에 짐 챙겨 밖을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여름도 아니고 비 맞으면서 시합하기는 정말 싫은데… 구만재저수지에 도착해 사이클 거치하고 킹코스 참가자들 7시 출발 후 2시간이나 기다린 뒤 하프코스 참가자들의 수영출발이 있었다. 왠지 킹 코스에 하프는 더부살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징조가 점점 현실화 되는 느낌이다.
수영(1.9km):
보통 하프에서 수영은 2km 이나 킹코스 3.8km(두바퀴) 를 염두에 두다 보니 수영이 조금 짧아 진 것 같다. 운무로 치장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산으로 둘러 쌓인 구만재 호수에서 수영할 수 있다는 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수영은 다른 어떤 운동보다 자세가 중요하다. 팔을 앞으로 던져 밀면서 반대 팔은 항상 무릎을 스치도록 당겨라… 길게… 2주전 선창룡코치가 준 팁을 몸에 익히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스토록 횟수를 줄일수록 힘도 덜 들고 빨라진다는 놀라운 비밀을 깨우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 풍차 돌리듯 숨을 헐떡이며 미친듯이 팔을 돌리다 끝날 때 쯤이면 거의 녹초가 되어 나온다. 수영한다기 보다 침몰한 배에서 탈출하기 위한 필사의 사투처럼 보인다. 그들과 같은 물속에 있으면 나도 흥분된다. 숨도 거칠어 지고 누가 내 몸을 건들기라도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공격적인 자세가 나오고 만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고 호수가 넓어 몸싸움을 별로 없었다. 수영 후 바꿈터까지의 거리가 500m 정도로 꽤 길어 보였다. (실계측: 1.975km 0:37:20)
사이클(90km):
변덕스런 날씨. 가랑비에서 갑짝스런 폭우로 바뀌는 변덕을 되풀이 했다. 뿌옇게 습기에 찬 고글이 앞을 가로 막고 세찬 빗줄기가 얼굴을 아프게 내리친다. 이 운동 처음 시작할 때 강동클럽의 김일숙선수가 사이클 탈 때 페달을 밀면서 타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게 된 것 같다. 수영과 런에 비해 사이클은 항상 제일 못하는 종목이었다. 런이 안되는 이유도 있지만 이제 믿을 건 사이클 밖에 없다.
경쟁자를 이길 유일한 무기는 사이클이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허벅지가 터져라 밟아 되었다. 20km쯤 타면 허벅지가 조금씩 풀리면서 타기가 수월해 진다. 그러다가 80km 정도 넘어가면 또 다시 허벅지가 거의 마비상태로 가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90km 가 넘어서자 길을 잘못 들어섰나 당황… 메타가 100km를 찍고서야 구례공설운동장에 들어 설 수 있었다. (실계측 100km 3:08:52)
런(21km):
허벅지가 너무 아프다. 천천히 뛰면서 풀리기를 기다려 본다. 많은 선수들이 날 추월했다. 배번을 하나씩 외우며 나중에 잡아야지… 예전엔 그게 가능했다. 초반에 잘 뛰던 선수를 보며 아 나도 저 선수처럼 잘 뛰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했는데 나중에 다 추월했던 기억이 있다. 런에 요행이나 행운은 없다. 딱 훈련한 만큼 뛸 수 있는 게 이 운동이다. 뛸수록 속도가 떨어졌다. 거리에 거리표시도 전혀 없고 코너에서 물어봐도 전혀 모른다고 하고… 킹코스는 4lap, 하프는 2lap이라는 푯말만 붙어 있었다. 거의 30km 는 되는 것 같다.
예상을 초과하는 거리에 지쳐버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질적인 발바닥 통증이 시작되었다.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지쳐버린 느낌이다. 전생에 얼마나 큰 잘못을 범했기에 그 업보를 치루고 있는건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킹코스는 3lap으로 줄였다는…. 이게 국제대회인지… 이 세상에서 제일 긴 하프코스를 뛴 것 같다.
대회의 가장 기본은 거리의 정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의 난이도는 다를지라도 거리만큼은 정확해야 기록경기의 의미가 있다. 5km 정도 짧은 마라톤 거리를 뛰고 서버3 했다고 하면 누가 인정을 해줄 것인가? 누가 이번 구례대회의 기록을 인정해 줄 것인가? 외국사람 몇 명이 대회에 참가했다고 국제대회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이건 정말 치명적인 대회 운영미숙으로 기록 될 것으로 보인다. (실계측 대략 28km 2:50:42)(전체: 6:36:52)
피니쉬라인: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두려워한다. 마라톤은 가장 고통을 수반하는 운동이다. 더욱이 트라이애슬런 마지막에 뛰는 마라톤은 지옥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지상 유일한 방법인지 모른다. 예전 킹코스에서 느꼈던 고통의 강도가 하프에서도 느껴진다. 제대로 훈련 안된 상태로 대회에 나간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를 깨달은 하루였다. 당신처럼 살면 난 하루도 못살 것 같다는 와이프가 피니쉬라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통의 끝. 거기엔 환희가 있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전복죽 두 그릇 먹고도 뼈만 남은 몸무게에 뭐 빠질 게 있다고 1kg나 줄었다.
운 좋게 12번째, 에이지부 우승을 하나 더 추가 했다. 나만 힘들게 한 게 아닌 모양이다. 6시까지 기다려 메달 하나 받고 비 오는 도로를 달려 서울로 올라 왔다. 내일은 말일이고 재산세등 마주치기 싫은 고지서들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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