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넘고… 폭우 뚫고… 한계이긴 영웅들” 지옥이라도 다녀온 듯 몽롱한 눈에 들어 온 활자-
동아일보 기자가 쓴 약간은 낭만적인 기사제목 밑에는 어제의 고통스런 기억은 사라지고 완주의
환희와 우정, 가족애, 자신감 그리고 그 가파른 오르막이 오히려 편안했다는 기사까지…
근육이 찢어질듯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건 일상의 지루함이 아닐까? 육체와 정신은 언제나
상반되어 육체가 편안하면 정신이 복잡해지고 육체가 힘들면 정신은 맑아진다. 내게 철인경기는
세속에서 더럽혀진 정신을 정화시키는 마지막 방법이다. 광속으로 바뀌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
스트레스의 천국에 사는 우리가 어딘가에 미치지 않고 살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난 굳이 그 고통스런
철인 삼종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욱이 가혹하리만큼 어려운 코스라는 삼척대회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6/13
혼자가 아니라 같이 동행할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동해의 맑은 바다와 하늘,
우린 수학여행가는 아이들처럼 즐겁게 삼척에 도착했다.
등록하고 바다로 갔다. 파도가 조금 있었고 물은 약간 차가 왔다. 수많은 대회에 참가했지만 대회 전날은
항상 긴장되고 왜 안 겪어도 되는 또 다른 고통을 자청했는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일찍 밥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기를 기원하면서…
6/14
친구 만나러 갔다가 대회 시작시간을 맞추지 못해 대회에 참가도 못하는 꿈으로 고통 받고 있는 데
백승엽이 날 깨웠다. 그게 현실이 아니라 꿈이란 게 너무 다행이다. 일어나자 말자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바리바리 짐을 꾸려 대회장으로 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한바탕 내릴
기세이다.
수영(3km):
긴장감은 7시 정각 출발 호각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하고 1분 뒤에 동호인
엘리트의 출발이 있었다. 앞에서 출발해서 인지 초반의 목숨 건 몸싸움은 훨씬 덜한 것 같다.
파도 때문인지 목 부분이 쓸려 따가 왔다. 바다 밑에서 다이버 들이 터트리는 후레쉬 불빛이 낯설지
않다. 나도 언젠가 철인운동 그만 두면 수중에서 사진이나 찍어 줄까? 기온이 낮아 사이클시 긴 옷으로
갈아입고 가야 할 찌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수영은 끝났다. (00:56:35)
사이클(80km):
이번 대회 최고의 난코스는 수영도 아니고 런도 아니고 사이클이다. 사이클이 약한 사람은 대회참가를
고려하라는 주최측의 안내문이 붙은 대회가 여기 말고 또 있었을까? 1300m 고지를 올라가야하는…
첫 긴 언덕이 나타나는, 태백시내를 통과하는 35km 정도 까지는 정상의 선수들과 거의 대등한 속도로
따라 갔다. 그러나 나의 발악은 거기 까지 였다.
모타라도 달은 듯 그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는 선수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기록을 단축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사이클 내리지만 말고 7-8km 속도로 라도 그냥 이 고개를 넘어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다. 허벅지가 돌처럼 굳어오고 왼쪽무릎 인대가 늘어났는지 고통이 심하다.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안개가 자욱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 가파른 등산코스를 누가 사이클 코스로 만들었는지… 정부에서 강제로 여길 사이클로 올라가게
했다면 분명 데모하고 백성들 괴롭히는 나쁜 정부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게 틀림없는 일인데…
시간 들여 돈 들여 아무 불평 없이 끙끙대는 철인이란 인간들이 이해가 안 간다.
나도 그런 인간중의 한 명이지만…
겨울에 로라도 타지 않고 3,4번 유명산 가는 것으로는 이 코스를 제대로 타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 할 즈음 정상에 있는 바꿈터에 도착했다. (03:38:00)
런(20km):
사이클을 천천히 타서인지 몸 상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조금 빠른 속도로
런을 출발했다. 문제는 비포장 내리막에서 발생했다. 작은 돌들이 무수히 깔려 있고 가파른 내리막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족저근막염이 심한 오른쪽 발바닥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오른발을
빨리 땅에서 떨어지게 해서인지 왼쪽 무릎이 아파왔다. 춘천마라톤에서 내리막에서 무릎을 다처 거의
1년을 뛰지 못했던 기억이 더 이상의 질주를 가로 막았다.
거의 짐승 수준으로 내리막을 달리는 선수들이 날 추월해 갔다.
“ 이 대회가 마지막이 아니라 또 대회는 있고 난 또 참가해야 하니… 내겐 저조한 기록보다 부상이 더
무섭다.” 스스로 자위하면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고통스런 여정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01:52:42 Total 6:27:16)
(이번 대회에 함께 한 훈련 파트너 나, 배미경, 백승엽, 문철)
Finish Line:
기록에 관계없이 살아서 여길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등산코스로도 쉽지
않을 오르막을 사이클 코스로 선택하고 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갈내리막길을 런코스로 택한 주최측에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마지막 제공된 호텔 사우나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따뜻한 욕조의 물 속은 어쩌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느껴 오던 어머니의 뱃속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그런 곳이 아닐까? 파도 넘고, 폭우 뚫고, 죽음의 사선을 넘어 온 전사에 대한 보상으로 엄청난 상금이나
최신 240Hz 54인치 삼성 LED HDTV 보다 당장은 따뜻한 물속이 훨씬 더 좋은 선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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