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피겨여왕으로 우뚝 섰을 때
눈물을 흘리며 좋아한 건 본인뿐 아니라 한국민 모두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스포츠나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속에
감동이 있고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별로 재미도 없고 힘만 드는 철종삼종 대회에 갖은 부상과 사고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7년째 계속 참가하고
있는 이유는 이 속에는 진한 감동과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6/27
10시경 백승엽이 모는 차를 타고 속초로 출발했다. 긴 시간 혼자가 아니라 같은 취미를 가진 누군가와 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엑스포회관에서 등록하고 바다로 갔다. 호수 같이 잔잔하고 수온도 적당하여 수영하기에는
좋은 여건처럼 느껴졌다. 750m 한 바퀴 돌고 숙소로 갔다. 저녁 먹기 전, 설악산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주위를 30분간
뛰었다. 어릴 때 외가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미꾸라지 잡던 작은 개울이 보인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릴 때
고향의 아련한 추억을 여기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다.
찰밥에 미역국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날씨도 덮고 모기도 있어서 인지 잠이 통 오지 않는다. 항상 바쁘게 살다 이불 위에 누워 정신이 말똥말똥해 지면
평소에 생각지도 않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왜 엄청난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여 이 먼 곳까지 대회에
참가하러 왔는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6/28
일어나 하늘을 보니 너무 청명하다. 휴가 왔다면 날씨를 주관하는 절대자에게 감사의 기도라도 올렸겠지만…
비나 좀 오지… 대회 때 이글거리는 태양이 너무 무섭다. 짐을 꾸려 대회장으로 갔다. 아무리 일찍 나와도 시합
전에는 항상 분주하다. 타이어 바람도 한번 더 넣고, 화장실도 한번 더 다녀오고, 뭐 빠진 것 없는지 체크하고,
수영도 해 봐야지…
수영(1.5km):
출발신호를 기다리며 바다 앞에 섰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린다. 온갖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복잡하게
얽힌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일을 아니 와이프가 그렇게 자제하라고 말리는 일을 이 먼 곳까지 와서 고통을 감수
해야 하는지, 변명꺼리라도 있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팽팽한 긴장감이 너무 싫다.
뿌~ 하는 고동소리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바다로 뛰어 들었다.
동호인 엘리트에게 1분 먼저 출발하게 한다는 건 큰 특혜이다. 그건 초반 300m 정도의 목숨 건 몸싸움을
안 해도 된다는 얘기 이기 때문이다. 중고로 산 풀 슈트가 헤어져 예전에 입던 민소매 슈트를 입었는데 팔은
자유로와 빨리 가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실제 기록은 좋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동물인가 보다. 대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바다 속에서 적당히는 바다를 벗어나는 순간 바로 후회로 바뀐다.
좀더 잘할 수 있었는데… (0:29:45)
사이클(40km):
해안가라 바람이 좀 심하고 미로같이 설계된 코스를 3 바퀴 돌게 되어 있다. 언덕도 거의 없고 반환점에서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다거나 어려운 부분은 거의 없어 평범하다. 평범은 어떨 때 경기
에서 가장 나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다른 곳보다 평속이 잘나오기 때문에 내가 지금 너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토인비가 얘기했듯이 역사의 발전은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코스가 너무 쉬워 기록이 저조했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까?
사이클 기록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수영을 잘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수영에서 늦게 나오면 같이
사이클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기록이 느린 사람들이라 상대적으로 내가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져 속도를
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1:07:25)
런(10km):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동물적인 행위는 뜀박질이다. 아득한 원시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먹이를잡기 위해
뛰어 다녔다. 그 당시 뛴다는 건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였지만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뛴다는
건 아주 특별한 행위(운동)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뛰는 건 인간에게 아주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나도 그렇다.
좀 더 빨리 뛰기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별한 걸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필연적으로 부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찢어질듯한 발바닥의 통증과
금방이라 멈춰버릴 것 같은 심장과 허파의 아우성, 이 여러 고통을 인내하며 좀 더 스피드를 내야 할지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할지… 우리의 고귀한 의지는 시험 당할 수 밖에 없다.
생각 없이 야수처럼 뛰고 싶은 건 마음 뿐, 상처받기 쉬운 영혼은 육체의 작은 고통도 지나치지 못한다.
경기에서 뛰는 10km는 절대 짧은 거리가 아니다. (0:44:47) (Total 2:21:56)
피니쉬라인:
작년보다 5분 늦은 기록으로 여기를 통과했다. 참가자 치고 기록단축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기록이 저하한다는 걸 통감한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슬픔이다.
동호인들의 기록상승이 무서울 정도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나친 기록 경쟁이 즐거운
취미활동으로써의 운동차원을 넘어서 가족, 친구관계나 사회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나 않을 지…
일상의 활력이 되고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 자신의 건강을 헤치고 주위를 황폐화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이건 내가 할 얘기가 아니고 내가 들어야 할 얘기 같은데…
(시합끝나고 입상식 사진 찍어주는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