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 대회가 열렸던 제주의 2007년 8월 26일은 내 생애 가장 길고 험한 하루였다. 서있기 조차 힘든 상황에서 42.195km를 뛰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 마라톤 시작하며 포기를 생각했었는데… 도대체 이 고통을 참는다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는걸까?
8/24(금)
제주엘 간다. 일상을 벗어나 어딘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4번째 아이언맨 대회에 참가하는 심정은 조금 착찹하다. 그냥 즐기기 위해 간다고 최면을 걸어 보지만 긴장되고 초조하고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뭐라는 사람 없어도 기록에 신경쓰이고 사고나 돌발상황으로 완주조차 못할찌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한다.
저녁 만찬식장에서 50대 베테랑(정대회, 채희영, 전태선)들을 만났다. 올해 6번 철인 경기에 참가하며 항상 이들과의 경쟁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들을 잡지 못한다면 입상이나 하와이티켓은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기록 좋은 일본 친구들이 대거 몰려 온 게 변수이긴 하지만… 철원대회까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왔는데 철원대회의 사고와 8/15 당한 사고 이후 떨어져 버린 체력과 훈련의 난조, 아직 낳지 않은 부상의 휴유증이 걱정이다.
8/25(토)
중문바다에서 수영 2km, 사이클 20km를 탔다. 힘든다. 이 정도도 힘드는데 내일이 심히 걱정이다. 경기 설명회 듣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8/26(일)
운명의 아침은 밝았다. 어제 해둔 찰밥 한 그릇 먹고 짐 챙겨 대회가 시작되는 중문바다로 갔다. 가랑비 내리는 구름 낀 하늘을 기대했지만 하늘은 청명하고 이상기온이라고 할 정도로 덮다. “아 오늘 죽었구나” 10시간 이상 도로를 달려야 하는 선수에게 강렬한 햇빛보다 더 무서운 건 없다.
수영(3.9km)
언제나처럼 광할한 바다, 출발선에 서면 인간 내면의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로 돌입한다. 왜 왔는지하는 차원을 넘어 어떤 놈이 이런걸 만들었는지에 대한 저주까지…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들리고, 1200명 가까운 선수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파도 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온이 24도를 넘어 슈트를 벗어야 한단다. 슈트를 입으면 하와이슬롯과 입상에서 제외 시킨다고 한다. 거추장스러운 슈트를 벗게 되어 오히려 홀가분하다. 인간만큼 적응 잘하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아마 공룡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듯 인간은 벌써 이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과 몸싸움하며 파도 치는 바다에서 수영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몇 백 미터만 잘 견디면 인간은 적응력이라는 신이 부여해준 막강한 능력의 도움을 받게 된다. 수영은 최대한 편안히 몸푸는 정도로 하고 나와야 한다. 본 게임이 기다리고 있으니… (1:20:32)(T1: 05:50)
사이클(180.2km)
매년 사이클에서 고전해서 기록이 안 좋아 이번만큼은 사이클에서 뭔가를 보여줘야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늦어도 90km까지는 평속 33km로 타고 전체 6시간 안에는 끝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10km 까지는 다리를 풀며 천천히 탔다. 50km 해안도로를 들어서자 홀린듯이 페달을 밟아 40km 이상의 속도로 나아갔다.
경기하고 전쟁하고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경기에도 손자병법은 유용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데 난 제주의 폭염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으로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했다.
90km 스페샬푸드 지점까지의 평속은 거의 33km을 찍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회복하기 힘든 상태로 지쳐 있었다. 돈네코를 지나고 부터는 사이클 탈 때 한번도 아픈 적이 없는 무릎의 통증이 시작되었고 다친 갈비뼈가 아프다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다. 햇빛이 칼날처럼 어깨를 파고 들었다. “하나님 제발 비 좀 내려주세요” 수도 없이 외처 봐도 무심한 하늘은 끝내 응답을 거부했다. 사이클이 끝날 때 쯤에는 무릎과 허벅지, 갈비뼈의 통증이 극심해 이 상태로 42.195km를 뛴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6:25:10)(T2: 01:47)
마라톤(42.195)
출발과 더불어 포기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천천히 걸으면서 포기할 시점을 찾고 있었다. 출발하자말자 포기한다는 게 좀 철인답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쩔뚝거리며 조금씩 뛰며 앞으로 나아갔다. 희란님이 날 보며 뛰쳐 나왔다. 희영씨도 포기하고 일본 애들도 전부 맛탱이 갔으니 절대 포기하지 마라 그 정도면 괜찮다고 했다. 인간이란 정말 간사한 동물인 것 같다.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난 절대 완주하지 못했을 것 이다.
2km 간격으로 있는 보급소 마다 무릎과 허벅지에 스프레이를 하염없이 뿌리며 조금씩 달려 나갔다. 스프레이가 진통작용이 있는지 뿌리면 통증이 잠시 사라졌다. 제주 팔월 오후 3시의 살인적인 햇살, 서있기 조차 어려운 다리의 통증, 점점 심해 지는 가슴의 압박,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 거리… 이 모든 것들이 완주를 향한 나의 실낱 같은 의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정말 잘해 보고 싶었는데…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늘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4:58:57)(12:52:14)
Finish line:
해는 졌지만 열기 가득한, 장내 아나운서의 축하 메세지를 들으며 제주 월드컵 경기장에 세워진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완주했다는 짜릿한 전율은 고사하고 기쁘거나 행복한 기분이 아니다. 이 대회를 위해 일년 동안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보답이 이거란 말인가? 허무와 알 수 없는 분노, 울적한 기분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완주메달 하나가 금방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복잡한 철학적, 종교적 계산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8/28(화)
적당히 지나치기에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 절뚝거리며 정형외과를 찾았다. X-ray film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가 내 눈을 빤히 처다 본다. 갈비뼈가 골절되었는데 어떻게 시합에 나갔냐며 의사 특유의 과장된 협박이 시작되었다.
뼈가 어긋나 심장이나 폐를 찌르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상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얘기, 왜 전번에 왔을 때 가슴얘기는 하지 않았냐고 조금 지나면 나을 것 같아서… 라고 얼버무렸지만… (사실 어차피 제주에 가기로 작정했는데 의사의 협박에 갈등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두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그곳에서 경기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손가락 마디가 쑤시고 온몸이 가렵고… 식은 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을 때 꿈속에서 아픈 부위가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다. 만신창이가 된 건 육체뿐이 아니라 영혼조차 병들어 버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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