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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인 영광 2007 철원대회 후기2위 23



바로 10m 앞에서 검은 경쟁자가 달리고 있다. 그를 잡으면 우승은 나의 것이다. 그를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살을 태워 버릴듯한 태양의 이글거림, 무릎과 팔꿈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는 왼쪽 엉덩이의 통증… 조금씩 멀어지는 검은 그림자… 왜 나는 지금 여길 뛰고 있는가? 왜 이 고통을 참아야 하는가 란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칠대로 지처버린 영혼은 더 이상의 고통을 거부하고 있었다. 우승한다고 뭐 돈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즐기면서 하면 되지… 허무가 밀려왔다. 입상 그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상처뿐인 영광인것을…

철원대회는 올해 들어 6번째, 7월 들어 3번째 참가하는 철인 경기다. 너무 잦은 대회로 심신이 너무 피곤하다.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대회 끝나고 회복도 안된 상태에서 바로 시합, 시합은 축제라는 나의 생각이 어느 때부터 인가 승리를 위해 적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터에 나아가는 전사가 된듯한 착각과 혼란으로 바꾸어 버린 건 아닌지… 이건 아닌데… 입상은 전혀 꿈도 꿀 수 없고 그냥 경기를 즐길 수 있었던 때가 너무 행복했던 것 같다.

7/22
조금 멀기도 하고 바꿈터가 두 군데나 되어 아침에 가기가 조금 부담되는 거리임에도 그냥 새벽에 가기로 했다. 3시30분에 일어나 화장실 갔다 이것 저것 준비하고 같이 가기로 한 유제형, 정환희님을 태우고 4시30분 철원을 향해 출발했다. 6시 10분경에 고석정 본부에 도착 등록하고 사이클 거치하러 토교저수지로 갔다. 저수지 반은 이북 땅이라고 한다. 최초로 민간인에게 공개되는 곳이라는데 바다처럼 넓고 깨끗하다.




수영(2km):
시합은 9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한 바퀴를 도는 코스다. 수영기록이 저조한 것이 지금껏 사용하던 민소매 슈트 때문이라고 결론 지운 후 중고장터에서 13만원 주고 풀슈트를 하나 구입했다. 수영장에서 입어보니 너무 답답하고 팔이 어색하여 가는 날 아침까지 고민해야 했다. 책에 보면 풀슈트가 부력이 좋고 마찰저항이 적어 기록에 유리하다고 되어 있고 엘리트선수들도 전부 풀슈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이 좀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물도 깨끗하고 인원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인지 몸싸움도 많이 없고 해서 수영하는 동안 편안했다. (0:35:14)



사이클(90km):
시합 때 항상 가지고 나가던 ceepo 카본바퀴를 버리고 같이 훈련하는 분이 빌려준 Zipp (404)바퀴를 달았다. 철원은 거의 평지라 Zipp 바퀴의 탄력성을 한번 실감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사이클 시작하자 말자 거의 40km 속도로 밟아나갔다. 10km 정도 까지는 무릎이 많이 아팠지만 그 뒤는 적응이 되는지 별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ceepo보다 더 많은 힘을 요구하지만 힘만 받쳐 준다면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빠른 느낌이다.
20km 가까이 지날 때 한 무리의 그룹이 날 추월해 갔다. 그냥 두 세 명이 아니라 족히 10명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을 추월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금방 잡히고 만다. 그들 뒤에서 따라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작년처럼 사이클 실력이 형편없을 때는 드리프팅을 할 엄두도 못 내었는데 앞에서 가다 보니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도로를 전부 점유하여 3,4 겹으로 진행하는 무리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갑짜기 앞서가던 사이클 하나가 옆으로 넘어지며 옆 사이클을 치고 순식간에 몇 명이 넘어졌다. 넘어지며 누군가가 왼손을 쳤고 난 도로 풀밭 쪽으로 밀려났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넘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언덕을 만나면서 팀이 분해되었다가 또 만들어졌다. Tour de France를 연상하리 만치 수십명이 몰려다닌다. 추월하기도 불가능하고 뒤에 처치면 또 후미 그럽에 잡히게 될 것이다. 한번 사고를 목격했기에 더 이상의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그룹과 한 5m 이상 떨어져서 나갔다. 속도는 거의 40km 가까이 된다. 드리프팅을 감독하는 오토바이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
정말 속도 내기 좋은 4차선 일직선 도로, 75km 지점에서 앞서 가던 그럽 중간 부분에서 TV화면에서나 본 것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거의 7-8 대의 사이클이 순식간에 4차선 도로에 나딩굴어졌다. 브레이크를 적당히 잡으며 속도를 줄이며 넘어진 사이클을 피해갔다. 몇 대를 피해 갔는데 마지막 사이클을 피하지 못하고 도로에 내 팽개쳐졌다.
순간 헬멧이 아스팔트 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왼쪽 무릎과 발꿈치에서 피가 흐르고 엉덩이 부분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듯 통증이 전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도로 가득 선수와 사이클이 넘어져 전장터를 방불케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사이클을 다시 타고 진행했다. 넘어지면서 받은 충격으로 유바 앞 연결 부분이 떨어졌다. 그냥 갈까를 몇 번 망서렸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돌아와서 다시 주었다. 조금 가자 20명 정도의 2진 그럽이 날 추월해 간다. 이건 아닌데… 많은 선수들이 20명 이상 떼를 지어가는 그럽을 본다면 따라가고픈 유혹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실력이 안되어 따라가지도 못할 실력이 아니라면…
선수 개인이 먼저 규정을 지켜야겠지만 주최측에서도 규정을 만들어 두었어면 그것을 감독하는 오토바이를 운행했다면 그렇게 위험하고 무분별한 드레프팅 그럽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르막이 많았던 춘천대회 같은 경우는 9바퀴 도는 동안 드레프팅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다. 내리막 보다 평지가 정말 위험한 코스라는 걸 실감한다.(2:35:03)




런(21km):
4km 조금 넘는 거리를 5바퀴 도는 코스로 구성되어있다. 바꿈터를 벗어나 런을 시작하자 의식하지 않았던 검은 경쟁자가 앞에 보였다. 인간에겐 누구나 경쟁심리라는게 있다. 이것 때문에 인류나 개인이 발전했을 것이다. 혼자서 뛰면 절대 대회 때 만큼 좋은 기록으로 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달리기 기록이 더 좋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천천히 뛰고 있었다. 뒤를 따라다니다 마지막 바퀴에서 잡고 싶었지만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 그냥 추월해 버렸다.
속도를 내어 많이 추월해 버리면 그가 따라 오지 못할 것이란 얄팍한 생각…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가 더 빠른 속도로 날 다시 추월했다. 그가 언젠가 지치겠지하며 10m 이내 거리를 유지 하며 3 바퀴째 까지 따라갔다.
태양이 따갑다. 추월은 고사하고 그를 따라가는 것도 힘이 든다. 사고 때 충격 받은 엉덩이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면서 정신까지 나약해진다.
따라 잡아 우승을 해야 한다는 의지와 이 운동을 왜 시작했는지에 대한 후회와 허무가 싸우고 있었다. 굳이 그를 잡아 우승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약한 인간은 항상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그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1:46:04)(Total= 4:56:19)



Finish Line:
열 지어 널어선 어린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피니쉬라인을 통과 했다. 고통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왠지 허무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팔꿈치를 흘러 내리다 굳어버린 핏자욱, 띄면서 많이 의식 못했던 엉덩이와 목의 통증… 이 경기에 철인이란 단어가 앞에 붙지 않았다면 난 분명 사고 났을 때 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철인이란 보통 사람과 다른 뭔가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날 뛰게 만든게 아닐까? 이 대회가 마지막이 아니고 8월 제주대회가 또 남아있다는 사실이 날 더욱 절망케한다.

(대회 간사님을 비롯해 자봉해 주신 분들 정말 고생많았습니다.)



박재범
::: 싸이클에서 넘어지고도....입상이라 형님 대단하십니다. 이대로 제주까지~~쭈욱 하와이는 한번 가셔야죠^^

여상훈
::: 형님~수고하셨습니다~~정말 대단하십니다~

박용태
::: 정말이지 환상적인 제주 아이언맨 후기의 프롤로그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형님 마무리 훈련 잘 하세요 !

장영미
::: 선배님 글을 읽고 나면 제 자신이 한심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회복 잘 하셔서 제주에서도 화이팅~~~하세요

김문겸
::: 잔차 사고가 있었는데 입상까지! 대단하십니다 ! 민소매 슈트와 풀슈트 차이가 있었는지요?

변영숙
::: 선배님 대단하세요.. 수고많으셨고 입상 축하드립니다...

서이택
::: 언젠가 형님께서 "경기에 임하면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감합니당...늘 고마움을 느낍니다..홧팅

서윤경
::: 올해 마지막 작품(아이언맨)이 기대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외롭고 허무해지겠지요(안티들도 생기고...^^)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부상없이 운동하세요.

박병식
::: 아~ 선두에선 그런 사고가 있었군요... 이만하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입상 축하합니다 !!

반세훈
::: 회복 잘 하셔서 제주에서 또한번 멋진 결과를 보고 싶습니다.

정일선
::: 부상임에도 역주하신 투혼, 존경스럽습니다. 입상도 거듭 축하드리고요.

이호정
::: 신랑한테 형님 부상 소식듣고 걱정했었는데, 큰 부상은 아닌것 같아 다행이네요, 너무 무리 하시지 마세요^^

이병은
::: 후기...긴박감이 있어 재밌네요...회복잘하시고요....자나께나..싸이클 사고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