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한밤의 탱크소리:
거리가 멀어 항상 망설이게 되는, 그러나 2003년 첫 출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해 매년 참가하게 되는 그런 대회인 것 같다. 6시에 잠실운동장에서 모여 통영으로 출발- 출발은 순조로왔고 날씨가 기분나쁘게 우중충한 것 빼고는 흠 잡을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사이클 손 좀 보고 혼자 바다로 나갔다. 가평에서 모진 추위로 고생했기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물은 그렇게 차지 않다. 저녁식사 시간엔 회에 맥주까지 한잔하고 9시 반도 안된, 축구 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전부 잠자리에 들었다. 통상적으로 멀리 나와 보면 꼭 늦게 까지 술 마시고 얘기하는 회원들이 있기 마련인데…
게다가 선배로써의 예우차원인지 2.5평정도 되는 작은 방으로 날 안내했다. 자려고 자리를 펴고 눕자 문제의 인물이 들어와 내 자리를 가로채는 바람에 난 문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틀동안 밤새미해서 아마 코를 골것같으니 혹시 코를 골면 자기를 발로 차라고 친절하게 대치법까지 가르켜 주었다.
“순진하기는 코 안고는 사람도 있나… 야전에서 그 정도야…” 그러나 내가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를 파악하는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2.5평 작은 공간을 순식간에 피비린내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진군한 적의탱크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만들기 시작했고 필사적인 나의 저항이 시작 되었다. 별다른 방어무기를 준비하지 못한지라… 손가락으로 귀를 막아보기도 하고 어릴 때 배운 수면유도법 – 양한마리, 양두마리,… 을 몇백까지 헤아리다 잊어버리고 다시 반복하기를 수차례 – 모든 방법이 무위로 끝났고 난 베개와 작은 담요 두 장만을 챙겨 후퇴를 결심했다.
나이트클럽의 불빛:
전쟁터를 벗어나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보니 탱크소리가 저 멀리서 자장가처럼 나지막히 들려왔다. 아 왜 성산도 없는 싸움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잠시 또 다른 적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입구에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켜지는 조명등이 고장났는지 나이트클럽의 불빛마냥 점멸을 계속하고 있었다.
목숨 걸고 자야겠다는 나의 의지와 행인을 유혹하는 나이트 클럽의 요사스런 조명간의 싸움은 참다참다 두꺼비집 스위치를 내릴 때 까지 계속 되었다. 밖은 벌써 부옇게 밝아 오고 시계는 5시를 넘기고 있었다. 내가 우승했더래도 이런 사족을 이렇게 장황하게 썼을까? 그가 헤어지면서 간곡히 후기에는 코골았다는 얘기는 절대 쓰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는데…
가평대회에서의 우승이 알게 모르게 부담으로 다가왔고 옆에 앉은 박국남이 말끝마다 “엘리트” “이번 대회 우승”이라는 단어들이 더욱 날 궁지로 몰아 넣었고 난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살생부:
주최측에서 준 명단에서 내가 우승하기 위해서 반드시 무찔려야 할 적들의 이름을 추적해봤다. 정대회, 전태선, 박인석(우리편인데..), 채희영(유희란씨 남편, 희란씨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 가평대회때 우승이 자신의 남편이 출전 안했기 때문이라고 전의를 불타게 만든 인물) 작년까지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록의 사나이들…
(내 말이 과장이라면 작년 기록을 한번 봐라 사이클 정대회 1:11:42 나 1:22:07 런 정대회 42:48 나 50:35, 전체 기록 17분차이: 올림픽코스에서 이 정도의 기록차이는 넘지 못할 산처럼 보이는게 어쩌면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그들보다 낳다면 유일하게 수영이다. 수영에서 4분차이를 만들수 있다면 한번 싸워 볼만한 대회가 될 것도 같았다.
6/3
출발(8시):
대회시작 전은 항상 두려움과 후회, 긴장과 도망가고픈 욕구가 뒤섞여 꿈틀거린다.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지금이라도 변명꺼리만 있음 짐 싸서 내려 가고 싶을 뿐이다. 어제 잠 못자서 포기한다면 웃음꺼리 밖에 안될 것 같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합당한 핑계거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백팔번뇌에 사로 잡혀 있는데 카운더 다운소리가 들려왔다.
수영(1.5km):
참가선수가 1200명에 달해 인원을 110명 단위로 나누어 모자를 다른 색으로 주고 10조를 30초 간격으로 출발시켰다. 이 방법은 출발장소가 좁아 어쩔 수 없는 주최측의 고육지책이라 할지라도 나같이 마지막에 출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먼저 출발한 선수 후미 그럽과의 치열한 몸싸움을 하게 만드는 최악의 방법이다.
출발하자 말자 750m 삼각형 바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적들보다 4분 빨리 나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은 사라지고, 어째던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꿈틀거리는 살육의 현장이 아름다운 통영바다를 피빛으로 물드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 지며 바다를 벗어나 바꿈터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31분을 넘기고 있었다. 아 이런 29분에는 나와야 하는데…친절한 희란씨가 일등이라고 소리쳤다. (0:31:30)
사이클(40km):
작년과 달리 올해는 주최측에서 한 바퀴 코스를 새로 개발하여 선보였다. 장사가 잘되어 손님이 많다 보니 코스의 난이도나 선수의 안전보다는 차가 거의 없는 해안가 도로를 통제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 많이 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10km 정도는 좁은 도로와 많은 인원말고는 그런대로 잘 나갔다. 해안도로를 들어서자 바다 쪽에서 불어 오는 강한 바람과 경사 급한 오르막이 반복되었다.
통상 힘들어도 오르막을 오르면 내리막에서 보상을 받기 마련인데… 급경사에다 급커브라 브레이크 잡지 않고 내려오다가는 언제 바다로 다이빙할지 알 수 없다. 몇몇 겁 없는 선수들의 전복된 사이클과 그들이 흘린 피가 도로를 물들이고 여기저기서 응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다급한 봉사요원들의 긴박한 목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게다가 5km 지점에서 물 한번 먹고 물병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물 보급을 계속 기다렸는데 끝내 보급소는 없었다. 이 인간들이 드디어 물 보급까지 중단해버린 것이다. 바짝 불어 트진 입술을 핥으면 기진맥진하여 바꿈터로 돌아왔다. (1:16:55)
런(10km):
바꿈터에서 소식통의 정보가 전달되었다. 내가 아직 일위란다. 출발하는 데 다시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었다. 바로 뒤에 적들이 출현했다는 좋지 않는… 그 적이 누군지는 파악 되지 않았다. 정보통은 다시 바꿈터를 돌아 뛰어 나가는 네게 뒤에 적들이 따라가니 잡히면 안된다는 메시지까지 주었다. 얼추 계산해 보니… 2분 정도의 거리 뒤에 적이 따라온다.
언제 적이 날 추월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4km 정도의 지점에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무리가 순식간에 날 추월했다. 둘은 1m 정도의 차이를 두고 기관차처럼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건 그냥 생각이고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을 때의 그 비애감을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마지막 1km 지점에서 정보통의 최후 통첩이 있었다. 3등이고 마지막에 한번 잡아보라는 말이 비웃음처럼 들리는건 약자만의 열등감인가? 가파른 언덕을 넘어 결승점으로 달릴 때 까지 아직 사이클을 열심히 타고 있는 선수들이 보였다. 아 불쌍한 중생들이여 이 더위에 얼마나 더 고생을 하려고…. (43:17)(Total= 2:31:41)
Finish Line:
결승점을 통과하여 완주메달하나 받아들고 안마 받으러 갔더니 적들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승자로써의 친절을 마음껏 부릴 대상이 왔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몸매가 좋다면서 마라톤 기록을 물어봤다. “3시간 8분” “음 난 3시간 18분인데…” 그는 알듯 모를듯 음흉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품고 기뻐하고 있었다.
“아뿔싸!”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보다 못 뛸 이유가 전혀없는데… (마라톤에서 10분의 차이는 무너뜨리기 힘든 거대한 벽으로 느끼는 사람은 거의 고수급이지..) 내가 그보다 못한 건 고통을 감내할려는 의지 -고통지수- 가 부족한게 아닐까?
곧 숨이 멈출 것 같은 고통의 극한치를 너무 낮게 설정한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들이 많은 대회였던 것 같다.
(대회 간사 맡은 최용환님 고생 너무 많았고, 통영에서 머리 올린신 분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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